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요시 나가요시 (문단 편집) === 막부와의 화친과 세력 확장 === [[쇼군]] 가문과 화친한 나가요시는 동문의 사용을 허락받았으며 자신은 고반슈에 취임했고, 그의 적자이자 후계자인 [[미요시 요시오키]]와 중신인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토모슈에 취임하게 되어 미요시 가문의 막부내 영향력은 더욱 더 늘어갔다. 한편 [[카와치]]에서는 슈고다이인 야스미 나오마사(安見直政, ? ~ ?)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키이]]로 달아난 슈고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高政)의 지원을 명분으로 카와치에 출진했다. 나가요시는 1559년 8월 1일, [[셋츠]]와 [[하리마]]의 호족들을 이끌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본거인 타카야 성(高屋城)을 함락시켰으며 4일에는 이이모리야마 성 또한 함락시킨 다음 야스미 나오마사를 [[야마토]]로 쫓아내고,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를 타카야 성으로 입성시키는 것으로 카와치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마사 자신이 나오마사의 후임으로 임명한 슈고다이 유카와 나오미츠(湯川直光)와 대립하게 되어 나가요시의 허락없이 야스미 나오마사를 슈고다이로 복직시켰다. 이에 미요시 나가요시는 분노하여 1560년, [[미요시 짓큐]]에게 [[시코쿠]] 세력의 지원을 요청, 짓큐는 이를 받아들여 양자는 카와치로 진군했다. 시코쿠 세력은 7월 3일, 하타케야마 타카마사 세력을 격파했고 순식간에 카와치에서 진형을 갖추었다. 이렇게 카와치 세력이 열세에 놓이자 야스미 나오마사는 이이모리야마 성에서 출진했으나 그 또한 시코쿠 세력에 의해 격파당했다. 그리고 카와치 세력을 후원하던 코자이 모토나리는 [[마츠나가 나가요리]]에게 격파당하고, 네고로슈(根来衆)는 10월 15일에 타카야 성외에서 궤멸당하여 결국 10월 24일,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와 야스미 나오마사는 타카야 성과 이이모리야마 성을 개성하고 [[사카이]]로 달아났다. 11월 13일에는 미요시 짓큐가 타카야 성으로 입성했고, 미요시 나가요시는 지금까지의 거성이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을 적자인 [[미요시 요시오키]]에게 내주며 [[미요시 나가야스]]를 보좌로 붙여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표시키고, 자신은 이이모리야마 성을 거성으로 삼게 되어 카와치는 완전히 미요시 가문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듯 나가요시는 스스로가 만든 무가 정권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요시 가문의 세력을 늘리며 호조를 맞이하여 '''하리마, 셋츠, [[이즈미]], 카와치, [[탄바]], [[야마시로]], [[야마토]], [[아와지]], [[아와]], [[사누키]], [[이요]] 등 [[키나이]]를 중심으로 10개국에 가까운 영지에 영향력을 뻗히게 되었다'''. 이로써 미요시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가문 내에 손쓸 수 없는 불행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나가요시가 쇼군을 등에 업고 키나이를 호령하자 [[오미]]의 롯카쿠 요시카타와 키이로 도망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가 반 미요시 세력을 구상하여 나가요시와 대립했다. 나가요시가 이에 대항하려 할 때 즈음인 1561년, 셋째 동생이자 키나이의 주요 사령관인 '''[[소고 카즈마사]]가 약 30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사누키와 키나이의 호족을 이끄는 소고 가문의 당주 카즈마사의 죽음은 당연히 미요시 세력에 크나큰 구멍을 가져왔으며 7월 28일이 되자 롯카쿠 요시카타가 야마시로로 출진했고, 이에 반응하여 하타케야마 타카마사가 이즈미로 출진했다. 나가요시는 후계자인 미요시 요시오키와 그의 동료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야마시로의 방어를 맡기고, 시코쿠의 총대장인 카와치 타카야 성주 미요시 짓큐에게 이즈미의 방어를 맡겼다. 이윽고 전쟁은 발발해 짓큐는 이즈미 쿠메다에서 하타케야마의 세력과 싸워나갔으나([[쿠메다 전투]]) 네고로슈의 불의의 기습을 받아 '''약 3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총대장의 부재로 미요시 세력은 쿠메다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짓큐가 이끌던 시코쿠세는 각자가 군사를 수습하여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그 압도적이던 미요시 세력에 승리한 하타케야마 세력은 이 기세를 몰아 북상하여 나가요시의 거성을 포위했다. 한편 시코쿠로 물러났던 [[시노하라 나가후사]]나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군세를 재편성해 [[효고현]]을 경유하여 이즈미에 재진입했고, 롯카쿠 세력에 밀리던 미요시 요시오키가 분투하며 나가요시가 포위되어 있는 카와치로 군사를 진군시켜 5월 20일, 쿄코지에서 하타케야마 세력을 격파하여 카와치를 구원했다([[쿄코지 전투]]). 타카야 성에는 미요시 짓큐를 대신하여 미요시 야스나가가 입성했으며, 짓큐의 적자인 [[미요시 나가하루]]를 새로운 시코쿠의 총대장으로 지지했다. 11월 29일에는 아와의 호족 세력이 나가하루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임을 표명하는 연판장(連判狀)을 작성했다. 한편 하타케야마 세력의 패퇴 소식을 들은 롯카쿠 요시카타는 나가요시와 화친한 다음 오미로 물러났다. 이렇게 나가요시는 미요시 정권의 위기를 버텨내는 것에 겨우 성공했다.[* 당시에 남겨진 문서들을 살펴보면 미요시 요시오키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미요시 나가야스]]의 이름은 보이는데 미요시 나가요시 본인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에이로쿠 연간의 나가요시는 이미 상당한 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